103

 

궤짝 두 개로 출발해 18만 이주민 진료 / 열린 마음으로 ‘함께하는 사회’ 만듭니다

17년 만에 첫 독립 진료공간 장만 / 1997년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 시작 / 첫 환자 30명… 현재는 하루 300명 / ‘이동클리닉’도 실시… “오병이어 기적”

영원한 멘토, 김수환 추기경 /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진료소 / 선종 직전엔 전 재산 340만원 기부 / 삶으로 ‘갚을 수 없는 빚’ 보답 노력

세상의 모든 소외된 이들을 향해 / 해외봉사 ‘라파엘 인터내셔널’ 창립 / 하반기 몽골서 교육의료센터 개설도 / “훗날 북한 의료지원 실현이 목표”

1997년 4월 13일이었다. 안규리(소화데레사•59•서울 성북동본당) 서울대 교수는 서울 혜화동성당 백동관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간이 진료소를 설치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파키스탄 사형수들과 만남을 가진 후 외국인노동자들의 열악한 의료 현실을 마주한 것이 계기였다. 진료에 합류한 사람은 안 교수와 함께 당시 서울대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CaSA) 지도교수 였던 김전 교수(현 라파엘인터내셔널 상임이사)와 학생 네 명이었다. 첫 진료에 30여 명이 찾아왔다. 학생들이 쓰던 물품을 뒤져서 궤짝 두 개, 간의 의자 몇 개로 마련한 진료소는 그렇게 시작을 알렸다.
두 달여가 흐른 후 김수환 추기경 도움으로 가톨릭대 성신교정 내 한 건물로 진료소가 옮겨졌다. 두 배로 불어난 환자 수에 서울대 의대 가톨릭교수회가 힘을 보태면서 진료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1년여가 흐른 1998년 6월,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였던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주교회의 의장)와 동성고등학교 도움으로 진료소는 동성고 4층 강당으로 이전했다. 강 주교는 치유의 대천사인 라파엘 천사 이름을 빌려 ‘라파엘클리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궤짝 두 개로 출발했던 라파엘클리닉은 17년여 시간이 지난 지금 18만여 명(2013년 말 기준)의 외국인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을 돌보는 의료봉사단체로 성장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새 진료소를 마련, 지난 5월 24일에는 축복식도 가졌다. 라파엘클리닉의 산파 역할을 한 안규리 교수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기적은 있다”고 했다.

기적은 있어요

안 교수는 성신교정에서 동성고등학교로 진료소를 옮기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궤짝 두 개로 진료소를 열었는데, 이사를 하려니 트럭 3대분의 짐으로 불어나 있었어요. 전혀 일이 안 풀릴 것 같았는데, 참 앞일은 모르는 것 같아요.”

김 추기경 등 지인들의 전폭적 지지가 용기를 갖게 했지만, “네가 무슨 마더 데레사인 줄 아느냐”, “무모하다”, “하다가 그만두면 시작한 것만도 못하다” 등등, 주변의 만류도 만만치 않았던 무료진료소 였다. 1년여 만에 트럭 세 대 분량이 된 집기들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기적’이었다.

‘내과’ 하나로 출발한 진료소는 동료 선후배 의사들이 의자를 하나씩 갖다 놓으면서 진료과목이 점점 늘어났다. 안 교수는 한 치과 의료진이 미용실서 쓰던 의자를 가져와 진료를 했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의사분이 무척 키가 컸는데, 시설이 부족하니 어디서 미용실 의자를 구해다 놓고 진료를 했어요. 결국 허리가 안 좋아지시기도 했죠.”

새로 이전한 진료소 건물에서는 최신 엑스레이 기기를 갖추고 상설 치과진료가 진행될 계획이란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첫 환자 30여 명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라파엘클리닉에는 현재 하루 평균 300여 명의 환자들이 다녀간다. 진료과목만 17개. 한 해 동안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들 수는 1만4000여 명 정도다. 한 회 의료진은 30여 명, 일반봉사자는 100여 명이 참여한다. 다문화가족,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지역 이동클리닉 운영을 비롯해 2007년부터는 ‘라파엘인터내셔널’이 발족돼 저개발 국가 환자들을 위한 의료지원 활동과 의료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한 활동 뒤편에는 1500명 가까운 개인 후원자, 90여 개에 이르는 단체후원, 또 물품•약품 등을 후원 해주는 수십여 곳이 함께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새 둥지,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의 무상임대 결정으로, 오랜 ‘복도 진료’를 청산하고 새롭게 둥지를 마련한데 대해 안 교수는 “환자들의 프라이버시 문제와 쾌적한 환경, 양질의 진료라는 면에서 자체건물 마련이 정말 큰 꿈이었다”면서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무엇보다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라파엘클리닉 방문 때마다 복도에서 북새통을 이루며 진료하는 모습에 ‘큰일났다’, ‘뭐라도 해줘야 하는데…’ 하며 안타까워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늘 빠듯한 재정으로 진료소를 운영해 온 입장이라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습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마련된 새 진료소는 진료공간은 물론 다양한 교육공간들과 함께 외국인공동체,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나눔의 장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상설 진료소 확대, 다문화가족 진료 프로그램, 몽골 연수교육 등 향후 계획을 설명한 안 교수는 그중에서도 지난해부터 시작된 ‘라파엘아카데미’(환자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단순히 약만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젊은 봉사자들에게 봉사의 참 의미를 알게 해주는 교육, 의료 연수 프로그램 진행, 차세대 의료봉사자 양성 등 다양한 포럼이 진행되는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라파엘클리닉이 탄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알려진 대로 선종 직전 라파엘클리닉 후원 통장으로 전 재산이었던 340만 원을 송금했다. 안 교수의 연구실에는 그 통장 복사본이 걸려있다. ‘돌려드릴 수 없는 빚’이기 때문에 ‘항상 간직하고 매일매일 그 빚을 잘 갚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마음들 안에서, 라파엘클리닉 새 건물 1층에는 김수환 추기경 ‘메모리얼 월’이 세워졌다. 그리고 경당에는 최종태 교수가 제작한 김 추기경 흉상이 모셔졌다. 라파엘클리닉 10주년 미사를 찾았던 모습을 회고한 안 교수는 이육사의 ‘청포도’ 시구를 인용, “김 추기경은 라파엘클리닉의 모든 전설이, 이야기가 주렁주렁 열리는 핵심이셨다”고 했다.

생전 마지막 미사로 알려진 이 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라파엘클리닉을 통해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이땅의 인간 차별과 무시 속에 버려진 상태에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작은 꽃

한국 의료계에서 유전성 신장질환, 장기이식, 면역학 분야 연구와 임상의 리더로 꼽히는 안규리 교수. ‘규리’라는 이름은, 역시 과학자였던 부친(안동혁 전 한양대 교수)이 과학자로 성공하라는 뜻에서 ‘퀴리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알려진다. 안규리 교수가 교회를 접한 것은 유치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혜화유치원생 시절, 유치원에 파견됐던 한 수련 수녀가 어느 날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다. 어린 기억에도 스테인드글라스 등 성당에서 풍겨져 나오는 ‘신비한’ 아름다움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때의 기억을 간직했던 안 교수는 이후 스스로 성당을 찾았고 ‘소화 데레사’ 이름으로 영세 했다.

라파엘클리닉과의 인연 후 그의 신앙적 화두는 ‘하느님은 길가의 작은 꽃송이도 돌보신다’로 모아진다. 그는 “돌봄을 받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라파엘클리닉을 찾아오게 하는 발걸음은 갓난아이에게 누군가 우윳병을 건네는 것처럼, 실제로 누군가 애타게 돌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렇게 길가에 핀 한 송이 꽃도 하느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심정은 오래전 싹이 텃을 수도 있다.

미국 유학시절이었던 1989년 경, 안 교수는 ‘그저 환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샌디에고 인근의 불법이민자 캠프를 찾아 의료봉사활동을 했다. 마더 데레사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서 운영했던 이 캠프는 남미에서 미국으로 불법이주를 하려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람들, 또 그런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언젠가 그곳에서 만났던 마더 데레사의 한마디는 지금껏 안 교수에게 깊은 감명으로 남아 있다.

‘아주 단순한 모습’으로 기억 되는 마더 데레사는 그에게 “노숙인들, 아픈 이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넬 때 예수님께서 ‘땡큐’라고 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초라하기 그지 없는, 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물 한 컵에서 ‘감사하다’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는다니….” 놀라움 속에 큰 감동이 밀려왔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처음으로 왜 남을 위해 ‘봉사’라는 일을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사랑의 빚

라파엘클리닉을 이젠 자신의 ‘포도밭’이라고 부르는 안 교수는 진료가 있는 주일이면 거의 진료소에 나와 환자들, 동료들, 봉사자들과 시간을 보낸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이끌었던 줄기세포 연구팀에서 임상과 언론담당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던 그당시 여러 어려움 속에 ‘이민’까지 고려했었으나 결국 그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은 ‘환자’들이었다.

“마침 인도를 방문할 일이 있었어요. 거기서 목격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비참한 의료 현실은 ‘아직 할 일이 있다’는 숙제를 던져 주었습니다. 남아있는 시간 동안 ‘사랑의 빚’을 더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 결심은 라파엘클리닉의 봉사 정신을 해외로 연결시킨 ‘라파엘 인터내셔널’ 창립으로 이어졌다.

북한 의료지원의 꿈

‘정직한 진료’, ‘적정 진료’를 의료인으로서의 좌우명으로 밝힌 그는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 역시 ‘환자’와 함께 있을 때라고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환자는 ‘오늘 바로 내 옆에 있는 환자’란다. 그러한 의료인의 생활 안에서 가톨릭 신앙은 ‘없는 데서도 무언가 나눌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고 했다.

앞으로 안 교수가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무얼까. “우리 동포의 손으로 북한 의료지원을 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는 후반기 포스코 지원으로 몽골에 교육의료 정보센터(가칭)가 개설됩니다. 현지 의료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장소인데 몽골을 통해 북한 의료진들이 교육을 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교육 여건이 아직 미비해서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 합니다”.

라파엘클리닉에 대해 “누구나 조금씩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모이다 보니 1인분 정도의 몫이 된 것 같다”고 말한 안 교수. “자신도 그 안에 그저 작은 책상 하나를 놓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미소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환하게 주변을 비추는 ‘작은 꽃’의 향기가 났다.

2014. 06. 08 | 가톨릭신문 이주연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