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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현우의 인간正讀]

‘포스코청암상’ 수상… 이주 노동자 무료 진료 ‘라파엘클리닉’ 대표 안규리 교수

“19년간 매일이 기적…부족할 때마다 늘 누군가가 도와줘”

동료교수·의대생 4명과 함께 시작… 궤짝 2개에 처방전 등 넣고 혜화동 성당 구내에서 시작

환자 몰려 동성高 강당으로 이사, 필리핀·몽골·중국·나이지리아인…年1만6천명 진료하는 병원으로 성장

1996년 이른 봄, 서울대병원 내과 첫 여성교수로 임용된 지 4년째였던 안규리 교수는 천주교 고찬근 신부와 함께 광주교도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카레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파키스탄 사형수 두 명을 면회가는 길이었다. 사형수들은 1992년 경기 성남의 한 살인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4년째 갇힌 신세였다. 이들은 그러나 “우리는 결백하다”며 온갖 기관에 탄원서를 보냈고 이 사연을 알게 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재수사를 요청하는 등 관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파키스탄 사람들이니까 카레를 먹겠지’ 하는 생각으로 갔던 안 교수는 그러나 “음식을 줄 수 없다”는 교도소 측 제지에 영치금만 맡기고 카레는 도로 가져와야 했다. 이후 동료들로부터 “잘 만들 줄도 모르는 카레는 왜 들고 갔느냐”는 농담을 들은 안 교수는 ‘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의료봉사를 떠올렸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은 그렇게 식어버린 카레에 대한 명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듬해인 1997년 4월 13일 천주교 혜화동성당에서 시작된 라파엘클리닉은 25일 ‘2016년 포스코청암상’ 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돼 3월 30일 상금 2억원을 받게 됐다. 안규리(61) 교수와 서울대 의대 가톨릭학생회 지도교수였던 김전 교수(현 라파엘인터내셔널 상임이사), 그리고 서울대 의대생 4명이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첫날 30명 남짓한 환자를 진료했으나 19년이 지난 지금 연간 1만6000명을 진료하는 대형 병원으로 성장했다. 매주 일요일, 즉 연 52일밖에 문을 열지 않는 병원으로서는 엄청난 숫자다. 김수환 추기경의 끈질긴 탄원 끝에 두 파키스탄 사형수는 1999년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들은 끝내 안 교수의 카레 맛을 보지 못하고 석방 당일 강제 추방됐으나 그들의 형제 파키스탄인 노동자들은 97년부터 지금까지 안 교수에게서 무료 진료를 받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성북동1가 라파엘센터 4층의 작은 회의실에서 만난 그는 “청암상은 라파엘클리닉이 받는 것이어서 내가 조명받는 것은 정말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병원 건물이 번듯하네요.
“2014년 4월 천주교에서 이 건물을 무상임대해 주시고 후원금으로 리모델링해서 멋지게 이사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동성고 강당 복도에서 오랫동안 진료를 했죠. 겨울엔 난로를 켜고 여름엔 부채질을 하면서 일을 했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이 무상임대해 준 라파엘센터는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1177㎡(약 356평) 규모다. 1층은 접수와 투약, 5층은 성당이며 나머지는 지하 1층 내과를 비롯해 19개 진료 과목을 갖춘 병원이다. 각 층은 정중앙에 접수대가 있고 병상 하나와 책상 하나를 둔 미니 진료실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을 받을 만큼 아름답게 디자인된 건물로, 특히 5층 성당 공간에는 무슬림들이 라마단 때 동쪽을 보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동창(東窓)을 내기도 했다.

1908년대에 쓰던 궤짝 두 개에 처방전과 사무용품을 넣고 혜화동 성당 구내에서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외국인 환자가 밀려들자 불과 두 달 뒤인 1997년 6월 가톨릭대 성신교정 내 빈 건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사형수와의 운명적 만남
―얼마나 환자가 많았기에 두 달 만에 이사했습니까.
“그때 제가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를 30명까지 봤거든요. 그런데 하루에 70~ 80명씩 오는 거예요. 일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해서 4시쯤 끝내면 집안일을 하겠지, 했는데 밤 8시까지 진료를 해야 했어요.” 라파엘클리닉을 함께 시작한 김전 교수는 진료를 하지 않는 생리학자였고, 의대생들에게 진료를 맡길 수 없어 모든 진료 행위는 안 교수가 도맡았다.

―가톨릭대로 옮기고는 좀 나아졌나요.
“궤짝 두 개로 시작한 건데, 두 달 만에 짐이 리어카 세 대로 늘어났어요. 그만큼 물품을 도와주신 분이 많았어요. 책상도 주시고 의자도 주시고, 낡은 진료 기기도 주시고…. 그래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요. 서울대 치대 김중수 교수님은 미장원 의자를 구해 오셔서 치과 진료를 했어요. 그분이 키가 커서 허리가 무척 아프셨을 거예요.”

‘치유의 대천사’ 라파엘의 이름을 딴 라파엘클리닉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98년 6월 다시 이사를 했다. 이번엔 동성고 강당 4층 ‘ㄷ’자 복도 전체를 병원으로 쓰기로 했다. 안 교수는 “그때는 짐이 리어카 세 대에서 트럭 세 대로 또 불어났었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이 이곳에서 진료받을 수 있습니까.
“관광객들은 진료받으실 수 없어요. 처음 등록할 때 취업비자가 있는 여권을 제출하고 어디서 일하는지 밝혀야 해요. 워낙 언어 문제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아서 중국인 가운데 우리말이 자유로운 조선족 분들은 다른 병원으로 안내해 드리고 있어요.”

이주노동자 중 가장 많은 국적은 필리핀인이다. 그다음이 중국·몽골·나이지리아·방글라데시·네팔·파키스탄 등의 순이다. 이들은 경기 전역과 충청 일부에서 찾아온다. 대개 가구공장이나 축산농가·철공소·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상당수가 영어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한국외대나 전화통역 서비스 같은 곳에서도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라파엘클리닉을 찾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저녁 8시에 퇴근하는 일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인 데다가 무료이고 언어도 통하니 이들에겐 최적의 진료소이다.

―전액 무료입니까.
“이곳에서의 진료는 전액 무료예요. CT나 MRI 같은 고가 장비 진료가 필요하거나 수술을 해야 할 때는 100개쯤 되는 협력병원으로 보내요. 그러면 매우 저렴한 비용에 진료해 드리죠.”

―의료보험 대상자도 있을 텐데요.
“대부분 의료보험이 없어요. 이주노동자들이 대개 고국에서 빚을 지고 온 분들이에요. 그러다 보니 고용주와 절반씩 내야 하는 보험료조차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험을 포기한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무료 진료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어떻게 이주노동자 진료소를 생각한 겁니까.
“파키스탄 사형수들을 만나고 온 뒤 김수환 추기경님께 이런 진료소를 만들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추기경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추기경님은 선종(善終)하실 때까지 우리 병원의 든든한 후원자셨어요.”

2009년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미사는 라파엘클리닉 창립 10주년 미사였다. 2007년 5월 열린 이 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하느님은 진료를 하시는 그분들 안에도 계셨고 진료를 받는 그들 안에도 계셨습니다”라고 강론했다. 추기경은 선종 당시 자신의 통장 잔고 340만원 전액을 라파엘클리닉에 송금했고, 송금자인 추기경 이름과 액수가 적힌 이 통장은 현재 라파엘클리닉 1층에 동판으로 만들어져 전시돼 있다.

필리핀·중국·몽골 등 외국인 무료 진료 19년

―파키스탄 사형수들을 만난 것이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겠지요.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스크립스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1988년쯤 멕시코와 미국 접경 지역의 티후아나라는 마을에서 봉사했었어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남미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무료 급식소가 있었죠. 일주일 내내 면역학 연구를 하면서 하루는 봉사를 하자 해서 갔어요.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님을 만났어요.”

―테레사 수녀와 이야기도 나눴습니까.
“그럼요. 그분은 정말 보통 사람과 똑같은 분이었어요. 수녀님과 봉사자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누군가 ‘왜 평생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때 테레사 수녀님이 그랬어요. ‘저기 다리가 썩어가는 환자에게 물 한 컵을 건네면 그 사람 눈빛에서 하느님이 ‘고맙다’고 하는 말이 들려요. 여러분은 저 사람들이 ‘목 마르다’고 할 때 어떻게 들리나요?’”

―그런 경험이 라파엘클리닉으로 이어진 겁니까.
“그럴 거예요.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여전히 목마른 사람이 많은 것 같고 그 목마름이 하느님의 목마름으로 다가왔다고 할까요. 일주일에 하루 봉사하는 거니까, 내 인생 7분의 1만 진료 봉사를 하는 데 쓰자고 마음먹은 거죠.”

테레사 수녀와의 만남
―후원을 받지 못하면 실패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거예요. 테레사 수녀님의 그 급식소를 우리가 ‘수프 키친(soup kitchen)’이라고 불렀는데, 하루에 200명에게 두 번 죽을 쒀서 줬어요. 어느 날 보면 곳간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때마침 어디선가 후원금이나 물품이 들어와요. 단 한 번도 사람들을 굶겨서 보낸 적이 없대요. 우리가 라파엘에서 처음 무료 진료를 할 때 저한테 달랑 40만원밖에 없었어요. 저는 ‘줄 게 없으면 처방전이라도 무료로 써주자’ 하고 열심히 처방전 양식을 복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적십자사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한 달 200만원을 약값으로 후원할 테니 쓰겠느냐’고요. 그런 게 저에게는 모두 기적으로 느껴졌어요.”

―기적을 믿고 이 병원을 끌고 왔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 굉장히 겁이 났어요. 그렇지만 내가 실패하면 후배들이라도 좋은 길을 찾을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서 하지 않는 것은 선배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무사안일하게 도전해서 망하게 되면 ‘저렇게 하면 망한다’는 교훈이라도 후배들에게 주자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은 틀림없었어요.”

라파엘클리닉에 매주 일요일 진료 봉사를 하러 나오는 의료진은 30명가량이고 자원봉사자가 100명 안팎이다. 의료진 80%가량이 서울대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른 대학 의대에서 온다. 한 해 라파엘클리닉에서 한 번이라도 봉사하는 의료진은 약 150명가량이고, 지금껏 이곳을 거쳐 간 의료진의 총 숫자는 600명쯤이다.

―청암상을 받으면 상금을 어떻게 쓸 계획입니까.
“재작년 이 건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게 됐어요. 그 상금 2억원은 모두 라파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쓰게 될 거예요. 경기 지역 한 곳에 진료소를 하나 더 내는 데 4분의 1, 외국 의료진들을 교육하는 ‘라파엘 인터내셔널’에 4분의 1, 후배 중에 의료봉사를 할 사람을 양성하는 데 4분의 1, 또 우리 의무기록을 전산화하는 데 나머지 4분의 1을 쓰기로 했어요.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회의를 해서 그렇게 가닥을 잡았어요.”

―청암상도 일종의 기적입니까.
“맞아요. 우리는 항상 꿈이 넘치는데 늘 모자라고 부족해서 고민할 때 누군가 항상 나타나서 도움을 주셨어요. 우리는 그분들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요.”

―모태신앙입니까.
“아니에요. 제 아버지(안동혁 전 한양대 교수)는 과학자여서 끝까지 종교가 없었고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세요. 저는 혜화동 유치원을 다니면서 수녀님들과 친해지면서 가톨릭 신자가 됐어요.”

안 교수의 부친 안동혁 교수는 1950년대 상공부장관을 지내고 학술원 종신회원이었던 한국의 대표적 화학자였다. 그는 둘째 딸도 과학자로 크길 원했다. ‘규리’라는 이름은 ‘퀴리 부인’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변형한 이름이다. 안 교수는 실제로 영어 이름을 ‘Curie’라고 쓴다.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걸었군요.
“아버지는 우리나라 사람들 먹고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치셨어요. 저는 미대에 가고 싶었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미대에 가려면 네가 돈 벌어서 가라. 먹고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미술을 지원해줄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대신 택한 게 의대였어요.” 안 교수는 ‘안동혁 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필리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줘오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기신 것으로 하는 것이어서 내세울 것이 못 된다”고 했다.

안 교수는 미혼이다. 서울의대에 들어간 뒤 이정상 전 서울의대 학장과 함께 렙토스피라병과 쓰쓰가무시병 환자 발생을 처음 증명하는 등 “공부에 미쳐서” 결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을 갔고 돌아오자마자 교수 임용이 되면서 더 바빠졌다고 했다. 그는 “서울의대에서 저처럼 난리 치는 여자가 매력 있을 리 없었다”며 “그러나 사람 마음에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실연의 아픔이 교차하는 것이고 다만 상대방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라며 웃었다.

안 교수는 2005년 뜻밖의 사건에 연루돼 언론과 대중의 집중 관심을 받았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연구팀에서 줄기세포 응용에 대한 연구를 맡았던 그는 줄기세포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난 이후 검찰이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서울대로부터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는 수난을 겪었다. 결국 줄기세포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명예는 회복됐으나 여전히 그에게 ‘황우석 연구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아물지 않은 상처 같았다. 그는 매우 말을 아꼈으나 다만 “과학이란 1%의 거짓이나 조작이 있어도 컬래버레이션(협업)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라파엘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 일에서 배운 교훈도 있습니까.
“제 인생이 순탄했으면 몰랐을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나의 진실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같은 것들요. 그때 이곳 일을 모두 접고 미국으로 가려고 생각했어요.”

―왜 가지 않기로 했습니까.
“미국에 가려고 서류 준비를 하는데 포스코에서 전화가 왔어요(포스코는 라파엘의 오랜 후원기업이다). ‘인도 오릿사에 공장을 세우려고 하는데 의료 환경이 어떤지 가서 검토해달라’는 것이었어요. 마침 학교에서도 정직당했을 때여서 갔어요. 그때 내가 내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가르쳐주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어요.”

―무엇이었습니까.
“비행기가 연착해서 몇 시간 늦게 내린 그쪽 병원은 수드라 계급 아래 불가촉천민들이 치료받는 병원이었어요. 눈 수술을 받았다는 아이가 안대를 했는데 안대가 시커먼 거예요. 날이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가까이 가서 보는데 파리가 막 날아와요. 안대를 갈아주지 않아서 구더기가 들끓고 있던 거예요. 제가 웬만해서는 환자들 앞에서 덤덤한 편인데, 그때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그랬더니 바로 옆에 시신을 인도식으로 화장하는 곳이 있었어요.”

―그것이 라파엘에 남기로 한 계기가 됐군요.
“그런 아이들을 위한 의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2007년에 라파엘 인터내셔널을 만든 거예요. 의료 지식과 기술이 부족한 나라의 의료진들을 교육하는 사업이죠.”

“나는 독실한 마르타적 신자”
―스스로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독실한 마르타적 신자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리스도나 테레사 수녀님 같은 마음을 갖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성격을 빗대어 봉사하는 삶을 ‘마르타적(的)’, 기도하는 삶을 ‘마리아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신자에게 신은 왜 2005년 같은 시련을 줬을까요.
“내가 맡았던 환자가 숨질 때 간혹 ‘내가 저 사람처럼 아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러면 저 병을 해결하려고 더 노력했을 텐데, 내가 안 아파 봐서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결핵 앓은 것 말고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요. 그런데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오해와 분노와… 그런 많은 것을 겪게 된 거예요. 저는 단순히 억울하지는 않아요. 그랬더라면 그후 라파엘 10년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려야 했을 때, 저한테 명확히 보인 것은 환자였어요. 인도에서 본 그 눈 수술한 아이 말이에요.” 대한이식학회 이사장이기도 한 안 교수는 작년 세계이종이식(異種移植)학회 이사로 선출됐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환자도 있겠지요.
“많지요. 방글라데시에서 온 조이, 몽골에서 온 샤옥도돔이란 아이…. 저는 아이들이 특히 생각나요. 몽골 빈민촌에 가서 심장병 걸린 아이들 수술을 해주고 한국 음식점 가서 고기를 먹이는데, 저는 밖에 나가서 막 울었어요.”

―왜요.
“아이들 열 명 수술할 만큼 돈이 모이면 그걸 들고 몽골로 가서 수술을 해줬어요. 그런데 열한 번째 순서를 받아 수술 못 받았던 아이가 그다음에 가보면 죽었어요. 그래서 소아과 선생님들이 우울증 걸릴까 봐 못 가겠대요. 어떤 아이들은 수술받고 맛있게 고기를 먹는데 어떤 아이들은….” 안 교수는 말끝을 흐렸다.

헤어질 때 안 교수는 신신당부했다. “한 번도 라파엘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한 것처럼 제발 쓰지 말아 주세요. 여기 있는 모든 분이 별들이에요.” 그 말이 맞았다. 그리고 안 교수는 그 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빛났고 여전히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한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