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한성구 교수의 제멋대로 여행기] - 악묘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20-09-28 15:33
조회
2577

양자강 이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소주와 항주를 꼽는다. 항주는 서호도 있고 중국 최고 미인인 서시의 고향이기도 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오나라의 도읍이었고 그 이후 남송의 도읍이기도 했다. 항주에는 남송시대 최고의 명장인 악비(岳飛)의 묘가 있다. 악비는 중국에서 관우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충절의 유능한 장군이었는데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은 비운의 장군이라 후대의 중국 사람들이 악비를 숭앙하다가 급기야 그 묘도 악묘(岳廟)라고 불렀다.


송나라 휘종 때 송나라는 문약해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 금나라의 진격에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황제와 황후 등이 다 포로로 잡혀가는 굴욕을 겪는다. 이 때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건국한다.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금나라는 호시탐탐 남송을 없애려고 압박을 하는데 그 때 남송의 희망은 악비였다. 문약한 남송이지만 악비만은 달랐고 연승을 하면서 금나라 황제인 올출을 사로잡을 뻔하기도 했고 중원의 영토의 일부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때 남송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뉜다. 강력한 적을 놔두고 굴욕적인 화친을 해서라도 보존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우리의 힘을 모아서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오랑캐를 무찔러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했었다. 마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상에서 최명길의 항복하고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과 굴욕적인 항복은 절대로 안 된다는 김상헌의 주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남송에게는 악비가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있습니다.’처럼 악비에게는 악가군(岳家軍)이 있었다. 금나라 황제는 악비의 군대를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중원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 때 금나라의 재상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사를 보면 조정에서 힘을 쓰는 대신이 있는 나라에서는 밖에서 싸우는 장수가 공을 세울 수가 없다’ 그 이후 금나라는 남송의 실력자인 진회를 통해 어떻게든 악비를 제거하려고 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 평화의 조건으로 악비의 제거를 요구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금나라는 진회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만약 임진왜란 때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일본이 평화의 조건으로 이순신을 제거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면 조선을 어떻게 했을까? 일본 역사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포위했을 때 평화의 조건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없앨 것을 요구했었다. 열세의 도요토미 측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해자가 없어진 오사카성에 도쿠가와 군은 밀물같이 밀려왔다. 당황한 도요토미 측은 얼마 전 평화약속을 깬 것에 항의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답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적의 말을 믿는 바보.’


진회는 일선에 있던 악비를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병권을 박탈했다. 곧이어 악비가 역모를 꾀한다는 누명을 씌웠다. 조사과정에서 악비는 웃옷을 찍어 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精忠報國(정충보국, 온 마음으로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한다)이라고 새겨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항상 했었던 말이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을 하여도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한세충이 진회에게 따졌다고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훌륭한 장군을 해하려고 하느냐고 하자 진회가 했던 말이 걸작이다. “증거는 없지만…… 막수유(莫須有)……” ‘아니라고도 할 수 는 없지요.’라는 뜻이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악비는 목숨을 잃었다. 진회는 20년 이상 남송의 재상으로 있었다. 악비가 죽었는데 금나라는 남송을 쳐들어오지 않았을까? 그 때 금나라는 더 북쪽의 강대한 몽골의 압박으로 남쪽으로 영토를 넓힐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악비의 말처럼 금에 대항하고 중원 실지회복이 꼭 허황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악비의 사당을 ‘악왕묘’라고 부른다. 왕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악비의 상이 있는 본당에는 심소천일(내 마음을 하늘은 안다)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악비상 위에는 환아하산(내가 산하를 찾아오겠다)라는 악비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 악묘. 심소천일. 하늘은 내 마음을 안다. 억울한 악비의 마음이다. 여행팀에 관대한 전문가가 있으면 이런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촬영 김대환


▲ 악비의 상 위에는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악비의 유언이 써 있다. ‘내가 우리 산하를 찾아오겠다.’는 뜻이다. 촬영 서윤신


▲ 악비와 그 아들 악운의 묘. 부자가 같이 처형 당했다. 촬영 서윤신

악비의 묘 앞에는 진회 부부와 그 일당의 상이 있다. 다들 포박을 당하고 악비에게 사죄하는 모습으로 있다. 이건 도대체 언제 만들었을까? 전설에 의하면 남송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때는 돌로 만들었는데 하도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남아나지를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상들은 무쇠로 되어있다.


악비가 억울하게 죽고 20년 후, 진회가 죽고, 악비는 복권이 되었고 충신을 간신 진회가 죽였다는 시각이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악비가 지금처럼 숭상 받는 충절의 장군이 된 것은 명나라 때이다. 명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를 세운 나라이다. 한족의 민족주의의 나라인 셈이다. 게다가 성리학의 이념이 덧붙여지니 악비는 만고의 충신이고 진회는 간신의 표상이 된 것이다.



▲ 진회 부부의 상. 만고의 역적으로 악비의 묘 앞에 포박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상은 쇠창살로 갇혀 있다. 사실은 갇힌 것이 아니라 보호되고 있는 것이 맞다. 과거 돌로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돌을 던져 깨진 적이 있어서 무쇠로 바꾸었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 진회 부부와 함께 장준, 만사설의 상 앞에는 ‘침 뱉지 마세요.’라고 써있다. 그냥 가다가 저 글을 보고 다시 돌아와 침 뱉는 중국인도 보았다. 악비에 대한 숭상과 진회 일당에 대한 증오가 보인다.


▲ 악묘의 아름다운 담. 촬영 서윤신

진회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증오는 대단하다. 회(檜)라는 글자는 중국 사람들이 이름에 쓰기를 극구 꺼리는 글자가 되었고 항주의 길거리 음식 중에는 밀가루로 반죽으로 인형처럼 만들어서 기름에 튀기는 과자가 있다. 먹는 방법은 우선 머리처럼 생긴 부분을 먼저 떼어내서 먹는 것이란다. 진회를 끓는 기름 솥에 넣어 튀긴 후 목을 따는 셈이다.


진회의 죄는 화평을 주장해서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항복문서를 썼던 최명길은 국제정세를 읽고 백성을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려면 이 치욕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훌륭한 면모는 환향녀에 대한 대책에서 보인다. 청나라에 끌려 갔다가 고향에 돌아오게 된 여인들은 몸을 더럽혀졌다는 차가운 시선을 받고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최명길이 이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그 여인들이 몸이 더럽혀진 이유는 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서울 북쪽 홍제천에서 몸을 씻는다면 그 더러움을 씻은 것이다.’ 이런 재상이 필요하다.


진회 역시 현실감각이 있었던 사람이고 금나라에서 포로 생활도 해 본 사람이다. 그런데 진회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고한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권력을 잡은 후 공포정치를 심하게 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은 것이다. 오죽하면 진회의 정치적 동반자이었던 고종까지도 진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신발 속에 칼을 숨기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했을까?


만고의 간신의 표상이었던 진회는 현대의 중국 정부에 의해 조금씩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중국이 과거 한족의 나라에서 다민족국가…… 나아가서 제국이 되려는 생각이 움트고 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생각이 있는 것 같다. 한족의 입장에서는 악비가 충신이고 진회는 간신, 매국노일 수 있지만 이제 중국은 만주족, 내몽고의 몽골, 티벳, 심지어 조선족까지 모두가 중국 사람이라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악비는 편협한 민족주의자이고 진회는 다민족 국가의 시각을 가진 유능한 정치가라는 뜻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왜곡은 여기에도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