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천사 이야기

[인터뷰] 누구나 할 수 있는 의료와 나눔 - 서울대 의대 신장내과 안규리 교수

작성자
raphael
작성일
2020-08-03 10:17
조회
2708

서울대 의대 신장내과 안규리 교수


2-3p 삽입사진

연구성과, 업적 등 다양한 주제로 이 시간을 채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제 인생에 아직도 이루지 못했던 하나의 숙제, 나눔’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이 행복한 숙제를 여러분에도 들려드리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숙제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6년,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두 명의 파키스탄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톨릭 교수회 일을 돕고 있을 때였는데,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그들의 편지를 받고 예감이 이상하다고 한번 만나봐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단순하게 감옥에 있으니 먹을 것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에 손수 카레를 만들어 찾아갔습니다. 아쉽게도 교도소 내 음식물 반입은 허용되지 않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의료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이주 노동자들은 22만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불법 체류자이고 임금 체불로 의료 혜택조차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느낄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외로움까지 생각해보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서울대학교 생리학교실에 계셨던 김전 교수님께서 저의 뜻에 선뜻 동참해 주셨고, 서울대학교 가톨릭학생회 소속 학생들과 함께 진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때 저희는 간단한 약제와 진료도구만 들어있는 남루한 궤짝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지원을 해 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궤짝에 약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고, 혜화동성당 백동관에서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혜화동 백동관에 갔을 때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약 70-80명의 환자들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이 기적은 반갑지 않았습니다. 이 협소한 공간은 몰려드는 환자들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름 서울의대 내과의 첫 여교수인데 후배들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는 없어서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렇게 진료를 하다가 김수환 추기경님의 도움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관으로 옮겨 진료를 이어나갔습니다. 또 1년 뒤에는 동성고등학교 강당 복도로 자리를 옮겨 10년동안 그곳에서 진료를 했었습니다.

이렇게 진료를 하면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책상을 내어주신 신부님도 있었고 의료진을 위해 먹을 것을 싸오신 분도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라파엘클리닉이 꾸준히 활동하는 동안 우리와 같이 할 많은 의료진 인력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7개 진료과와 약국, 진료지원까지… 대형 무료진료소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니까 시니어 선생님들도 한 분 두 분 찾아오셔서 라파엘의 진료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환자들의 책임진료를 위해 2,3차 진료의뢰 병원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년에 천 명 이상의 환자들이 2,3차 병원으로 이송하여 진료 도움을 받고 있고, 중증환자의 경우도 50명 이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쯤 라파엘의 비젼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GRACE”입니다. 진료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연세대학교 의대생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GRACE는 ‘Globalization’, ‘Reproduction’, ‘Agape’, ‘Community’, ‘Environment’ 입니다.

Agape(진료지원)

‘Agape’는 종교적 의미에서 보면 ‘사랑’을 뜻합니다. 저는 라파엘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은 바로’정직한 진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학생들과 더불어 가는 이 진료소야말로 아가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을 위하여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진료하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는 언어적, 시간적, 문화적 장막을 줄여나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Environment(진료환경 개선)

사실 위에서 말한 아가페를 실천하려면 그에 맞는 환경도 갖춰져야 했었는데 초창기는 정말 열악했습니다. 여름에는 에어컨 하나 없이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를 쫓았고 겨울에는 화롯불에 옷을 태워먹기도 했습니다. 첫 치과 진료에서는 미용실 의자에서 환자가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저희에게 진료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큰 숙제였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하나둘씩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진료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2014년에는 건물 하나를 서울대교구로부터 무상임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직접 본 건물은 매우 낡아 있었습니다. 수리를 해야 했지만 가진 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매우 저렴하게 건물을 리모델링 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학과 교수님뿐만 아니라, 이문세, 노영심, 하림 씨 등이 발벗고 나서서 자선 음악회를 열어주었고, 많은 분들이 십시일반 거들어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라파엘센터’ 에서 지금까지 약 30만명의 환자들이 다녀갔으며, 2019년에는 100개의 나라에서 2만명의 이주노동자를 진료하였습니다.

Reproduction(세대 양성)

라파엘클리닉은 많은 것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넘쳐났죠. 많은 의대생들이 라파엘로 모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대학교 의대ㆍ간호대 가톨릭학생회 CaSA친구들 뿐이었지만 점점 다른 대학의 의대생들이 우리를 돕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정말 넘치게 찾아왔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요. 정말 순수하게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인 분들이었지요. 사실 정식 의사면허가 없기에 처방전을 써 줄 수는 없어서 큰 도움은 안 되었어요.(웃음) 그렇지만 대학생의 유입으로 봉사진의 연령층이 젊어져서 클리닉은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Reproduction’ 이라는 이슈로 함께 하기를 내심 바랬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소망대로 의대생이었던 분들이 불과 몇 년 뒤에 멋진 의사가 되어서 우리를 다시 찾아와 주었습니다.

‘Reproduction’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의료소외의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동두천에 라파엘클리닉을 만들었고, 작년에는 단국대 의대와 함께 천안모이세분소를 개소했습니다. 또한 다문화가정을 진료를 위해 버스를 빌려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동진료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정말 고달팠지만, 청년들과 함께 했기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눔은 성장을 이끈다’는 말이 맞는 듯 합니다.

Community(커뮤니티)

그랬을 때에 ‘커뮤니티’라는 미션은 저절로 이루어 졌습니다. 청춘들이 모였다 하면 서로 어울리기 바빴습니다. 라파엘에서는 봉사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하림씨는 클리닉을 찾은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들어주고, 또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뮤지션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고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축제의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혹시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고 싶으시다면 라파엘로 언제든지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Globalization(해외 의료지원)

마지막 해외 의료지원입니다. 2005년에 우연히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국립병원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안과 병동에 들렸었는데, 구더기로 가득 찬 안대를 하고 있는 어린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저와 같이 해 주실 분들을 모아 팀을 꾸렸습니다. 이것이 라파엘인터내셔널의 시작입니다. 팀을 결성한 2007년, 무작정 몽골 빈민가의 보건소 외래 클리닉을 찾아 갔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왔고, 저희는 힘든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진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한 소장님이 오시더니 저희를 쫓아냈습니다. 억울했지만, 마을의 상황을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마을에는 고혈압을 앓고 있거나, 결핵균에 감염된 사람들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우리가 단순히 약을 나눠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우리는 일단 그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해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했고 두 번째로는 공중위생을 위한 화장실을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잇솔질 방법 등 보건위생교육을 실시하고 운동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지 의료진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연수를 시켰습니다. 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한 지 몇 년 지나고 나니 한국에서 연수를 받은 의료진이 본국에서 또 다른 의료진에게 지도를 하고 있더군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환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몇 년 뒤에는 현지의 장기이식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체계적인 장기이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몽골 현지에 ‘라파엘 몽골리아’라는 현지 법인까지 세워져 자체적으로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몽골사업에 자신감을 얻고 미얀마로 넘어갔습니다. 미얀마에서는 현지 보건당국이 먼저 나서서 장기이식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로드맵에 맞춰 워크숍, 수술진행, 해외의료진 초청연수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미얀마의 장기이식 사업이 아주 큰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네팔, 필리핀, 라오스에서도 현지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서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지요.

‘나눔도 배움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참여 덕분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눈을 돌리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 큰 나눔을 위해서는 좀 더 배워야 했고 성장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라파엘 20주년을 앞두고 ‘라파엘나눔’을 설립했습니다. 아카데미를 통해 의료 나눔 문화의 성장과 자리매김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예비 의료인을 위한 프리메드 아카데미, 봉사자들을 위한 시, 노래, 미술, 경제,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ROSA아카데미, 한성구 교수의 그림이야기, 은퇴를 앞둔 시니어 의료인들을 재교육하여 사회공헌활동 참여기회를 확대시키는 라파엘나눔 생명과 나눔 시니어 아카데미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고요.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들이 잠시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봐주세요. 정말 유명한 그림이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입니다. 이 그림 가운데를 확대하면 결국 작디 작은 손가락 하나입니다. 이처럼 나눔도 작은 손길 하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시간이 되시면 작은 꽃 하나를 사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줘 보세요. 그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나 한번 살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제까지 라파엘의 작은 손길에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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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신장내과 오국환 교수와의 기념사진


사진제공=따사모(따뜻한 사진활동가 모임)